안전문이 닫힙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한걸음 뒤로 물러서주시기 바랍니다.
문이 닫히기 직전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설동역 가나요?"
"가요 가요, 어서 타요"
문 맞은편에 앉아있던 어르신이 대답하자 승객은 황급히 열차에 올라탔고 그와 동시에 문이 닫혔다. 지하철에서 자주 보는 광경이지만 매번 마음을 졸이게 된다. 어르신은 도움이 되었다는 기쁨과 함께 민망해할 승객을 위해 말을 건넸다.
"여기는 탈때마다 매번 헷갈리드라구. "
때마침 다음역은 보문이라는 안내말이 나왔다. 반대편 어르신이 대화에 참여했다.
"뭐여 보문이야?"
"이이, 다음이 보문 그다음이 신설동이야. 나는 보문까지 가고."
"아 감사합니다"
젊은 승객이 어르신께 도움을 드리는게 보통이기에, 역할이 바뀌어 더 훈훈해진 이 상황은 감사 인사와 함께 끝나는 듯 했다. 예상과 달리 어르신들을 향해 승객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 우이신설선, 라돈 수치는 괜찮나요?"
어르신들은 '라돈'이라는 단어가 무엇일까 생각했다. 때문에 약간의 정적이 흘렀다.
"여기 우이신설선이 방사능 수치가 높게 나왔다더라구요, 라돈이요. 그건 이제 괜찮은건가요?"
방사능은 아는 단어이다. 하지만 이해할 수 있는 그 단어가 어르신들을 또 다시 생각에 빠지게 만들었다. 나는 예전에 지하철 라돈 수치 측정에 관한 뉴스를 본 기억이 떠올랐다. 거슬러 올라가면 매트리스 파동도 있었다. 하지만 최근 난리가 난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승객의 입에서 나온 라돈이라는 말이 내게는 철지난 유행어 처럼 느껴져 피식, 웃음이 나왔다. 마스크도 안끼셨으면서 라돈을 걱정하시네. 어르신이 허공에 퍼지는 질문에 한숨을 내뱉으며 대답했다.
"아휴, 안전한 데가 없어, 방사능도 문제고 전염병도 문제고"
질문자 뿐만 아니라 그 주변의 모든 이들이 들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어르신은 목소리를 넓혀 말했다. 반대편 어르신은 '맞아맞아' 하며 고개를 끄덕이셨다. "밖에 다니질 말아야 해"라는 말을 끝으로 대화가 끝나는 듯했다.
정적을 깬 건 다시 그 승객이었다.
"지금 밖에 추워요?"
어르신과 나는 승객의 말을 귀로는 들었지만 머리로는 받아들이지 못해 고개를 들어 승객을 쳐다보았다.
"오늘 많이 춥나요?"
하루종일 집에서 뒹굴거리다가 저녁 약속을 위해 샤워를 하고 머리에 수건을 올린채 옷장 앞에 서서 거울과 옷장안을 번갈아보며 뭘 입을지 고민하다가 일하고있는 엄마에게 카톡해 물어볼 법한 승객의 이번 질문에 두 어르신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적적한 어르신께 지하철에서 만난 사람과 하는 가벼운 대화는 언제든 환영이었지만 연달아 예상치 못한 주제가 나오자 당황스러웠다. 이어지는 ‘어르신 참 따뜻하게 입으셨네요'라는 친근함에도 반응을 못하고 얼어있었다. 곤란하던 그때 마침 우이신설선은 보문역에 도착했고 어르신들은 대답 대신 짐을 챙겨 일어섰다. 걸음을 옮기는 어르신들을 향해 승객은 그냥 가시면 안된다는 다급함을 담아 마지막 말을 건넸다.
"어르신, 어머니 하느님을 믿어보세요. 성경 공부에는 그게 제일 좋아요. 어머니 하느님이요"
말씀을 전하는 승객의 확신에 찬 눈은 커져 흰자가 희번득 보였고, 검은자는 어르신이 아닌 저 너머를 보고 있었다. 이름붙일 수 없었던 친근함의 실체를 마주보자 어르신은 이상한 안도감과 함께 차가운 미소가 지어졌다.
"네네 성경 하느님"
대답과 함께 지하철 문을 건너는 어르신들 위로 안내말이 흘러나왔다.
안전문이 닫힙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한걸음 뒤로 물러서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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